2007. 1. 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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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독서편식이 심한 편이다.
소설은 좋아하지만 학문적인 전문서적은 싫어한다. 일본소설은 즐겨 읽지만 한국소설은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런 내가 모처럼 한국소설을 찾아 읽었다.
2005년 한국일보문학상 최연소 수상자. 한국문학의 기대주. 주목할만한 젊은 작가. 등등.
한국문학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신인작가.
아니 신인이라고 하기엔 그녀에게 쏟아지는 주목이 무척이나 큰 '김애란'씨의 작품집.
[달려라,아비]
내가 많고 많은 책.. 소설..한국소설... 그중에서 하필 이 책을 들었냐고 하면,
그녀에게 쏟아지는 한국문단의 그 주목이 궁금해서였다.
난 문학이 뭔지 잘 모르지만 그 문학계라는 곳에는 관심이 많았다.
코딩은 단 한줄도 짤 줄 모르는 주제에 웹표준이니 웹2.0이니 이런 거에 관심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설하고, 과연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토록 많은 문학계 인사들이 찬사를 보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쳐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찬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어려운책' 과는 달리, 부담 없이 술술 읽혀갔던 책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쾌함 속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문학에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그 무언가를 느꼈으니, 문학에 정통한 인사들이 찬사를 보낼만도 하다.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를 포함하여 총 9편의 단편이 모인 단편집이다.
우선 [달려라, 아비]를 보면,
어릴 때 주인공을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환상이 담겨있다.
그 환상이란 것이 신데렐라컴플렉스같은 망상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것보다 '도망'친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환상이다.
자신과 엄마를 내팽개치고 떠난 한심하고 저주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향해 쫓아가는 듯한, 계속해서 달리는 아버지의 환상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조차 현실에 흔들리기보다는 환상을 확대시켜나간다.
이러한 주인공의 상처받기를 거부하는 기억의 조작은 다른 단편에서도 보인다.
[사랑의 인사] 를 보면 다른 형식으로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주인공이 나온다.
동물원에서 버림받은 주인공은 미아보호소에 가서 말한다.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아닌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자의식을 채운 주인공.
세월이 흘러 수족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를 보게 되지만,
아버지는 사랑의 인사만을 남기고 또 한 번 사라진다. 이번에는 버림받은 게 아니라 정말 사라진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버지와 진정한 재회를 못한 주인공은,
그동안 "사라진아버지"로써 억눌러왔던 "버림받은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을 쏟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인물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 [영원한 화자]
이 작품에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하는 화자가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설명이 소설속의 캐릭터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설명을 보면, 나도 이런데?, 하는 부분들이 계속해서 발견된다.
결국 특정한 인물만의 특징이 아닌, 보편적인 사람들의 습성을 그대로 까발린다.
[영원한화자]를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지나치게 건방진 사람을 싫어하지만 겸손하게 굴면
컨셉이니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생각들 한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면,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타인에게는,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이미 틀안에 가둬놓고 규정해버린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등장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에서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여성은 생각이 많은 여성이다.
좋게 말하면 생각이 많은 거고 쉽게 말해 소심한 인물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 생각에 뒤이어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하면서 계속된 잡념에 사로잡힌다.
일찍 자야돼, 라는 생각을 집착하느라 잠을 설치는 사람.
잠에 빠져들만하면 새록새록 떠오르는 생각의 끄나풀들로 인해 잠을 설치는 사람.
불면증에 시달린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단편이다.
또한 소심한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캐릭터이다.
한 편 이 작품에는 위의 작품들과 같지만 다른 형태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위의 작품들처럼 자신을 버리다시피하였지만 다시 딸을 찾아온다.
위에서는 가족을 버리고 '달리'거나 아이를 두고 '사라지'거나 하는 식으로 능동적인 모습이지만,
[그녀가...]에서는 식물처럼 방구석에 앉아 TV만 끌어안고 사는 수동적인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모습을 관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주인공은 간접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는 것이 돈이 없기 때문일까, 라고 생각한 주인공은 가만히 TV위에 돈을 올려놓고 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라진다.
이 책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왜 C라고 말한뒤
상대방이 A라고 들어주길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위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께 용돈이나 드릴까 싶어 그냥 C라고 말하는 식으로 돈을 올려놓은 거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C를 '이 돈 가지고 나가버려' 라는 식의 A로 받아들이고 사라진다.
사람들은 흔히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빙 둘러 말하는 경향이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A를 곧이곧대로 A로써 받아들이지 않고 숨은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나름의 해석을 가한다.
그렇게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순수하게 소통되지 않고, 왜곡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그것이 지금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아닐까.
[노크하지 않는 집] 에서는 5개방이 달린 일종의 하숙집 풍경이 묘사된다.
이 하숙집이라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완전히 단절된 공간.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는 일이 없고, 서로가 밖에 있을 땐 자신의 방 밖으로 나가는 법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항상 그래왔듯이 그 공간을 돌아간다.
이 단편의 주인공도 이내 그러한 공간의 법칙에 적응해 나가지만, 무언가 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자신의 공간또한 변화를 가하고,
그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그 공간을 파헤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 시도 끝에 돌아오는 것은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에서는 없는 게 없는 편의점에 매일같이 다니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 단편의 여성은 매일 이용하는 단골이 있다.
그 여성에게 그 편의점은 경쟁점포와 다른 특별한 공간이다.
하지만 편의점에 있어서 그 여성은 숱한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존재로써의 화자.
그녀 역시 그러한 존재를 각인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무언가 달라 보이고 싶어하고 개성시대니 뭐니 떠들어댔었지만..
'개성의 몰개성화'로 인하여 그조차도 숱한 존재중에 하나였다.
비단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에게 있어서는..그냥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내겐 그 존재가 특별하지만 그존재에겐 특별하지 않은 나라는 존재.
이러한 존재의 실체를 그려내어 공감할 수 있었던 작품들도 많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별반 다를 거 없는 나라는 존재.
그리고 그런 나와 다를 바 없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을 보면서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단편들도 참 많은 공감과 놀라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이런 작품을 내가 모르고 지내왔구나..
기타등등의 놀라움.
생각해보면 어릴 때 외국동화는 안 읽어도 전래동화는 읽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제는 외국소설은 읽어도 한국소설은 읽지 않고 지내왔다.
이 책을 보면서 잠시 잊고 있던 한국소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기로 했다.
이 책을 본 것이 후회스럽지 않은, 참 다행스러웠던, 고마웠던, 작품이다.
2006년의 마지막부터 2007년의 처음을 장식한 책.
달려라 아비, 이 책은 충분히 한 해의 시작을 장식할만하다고 본다.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그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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