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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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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그리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적 삶을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온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장편소설. 나가사키의 과거와 현재를 한 야쿠자 집안의 흥망사에 비춰 그려냈다. 작가의 고향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흑백영화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미무라 가의 풍속도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흑백사진.
이건 흑백사진이다.
누군가는 무색의 밋밋함에 실망하고 내팽개치겠지만,
누군가는 흑백사진 속에서 어떤 아련함이나 그리움 같은 걸 느낀다.
바로 흑백사진 같다.


일단 요시다슈이치의 신간이 지닌 표지는 말 그대로 화려함 속의 수수함을 지녔다.
다소 만화적이고 요란한 틀에 가둬둔 지극히 서정적인 일러스트는 미묘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기존에 요시다슈이치를 접하기 전 지닌 어떤 기대감이나 실망감은 신경쓰지 않고 새롭게,
뉴페이스를 응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성장소설의 성격과 3인칭 시점의 결합으로, 성장기에 있는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지 않고,
그냥 곁에서 덤덤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
즉, 화려하지 않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시종일관 풍긴다.
이 책은 슌이라는 소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이어간다.

한 지방에, 어느정도 세력이 형성된 야쿠자를 외삼촌으로 둔, 슌이라는 소년을 이야기한다.
시간이 흐르고, 변하는 그 모습들. 그 틀을 벗어나고자 몸부리치는 슌.
슌은 시종일관 자신을 가두는 그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어릴 적 별채에 머물던 대도시의 유력한 야쿠자에게 데리고 가 달라고 하고,
중학교 때 절친한 친구의 가출계획을 들으며 자신에게 제안하기를 기다리고,
청년이 되어선 애인을 따라 대도시로 떠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하지만 슌은 변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곧 무언가 변한다는  걸 뜻한다.
누구나 세월을 따라 변해가지만,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머물러 버리면 결국 도태되고 만다.
슌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줄곧 벗어나려 한다.
슌은 그것을 알고 있지만 줄곧 별채에 머문다.
슌은 어릴 때부터 별채에  머무르며 시간이 흘러서도 별채에 머문다.
슌이 줄곧 지내던 별채는 결국 슌의 과거들이 쌓여가는 곳이다.
슌은 현재를 벗어나 미래를 향해 가고 싶어했지만, 결국 본인이 줄곧 머물렀던,
즉 본인이 쌓아두었던 과거의 무게에 밀려 현재에서까지 뒤쳐지고야 만다.

마지막에 시점이 한 번 바뀌는데 슌이 아닌 슌의 동생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한 번 뒤쳐진 슌은 쫓아가기를 포기한 듯 변하지 않았고,
그런 형을 바라보는 동생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그리고 그런 형 못지 않게 과거의 좋았던 '기억'에만 머물려는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또한 편치 않다.
슌의 동생 유타에게는 형이나 엄마가 머물기로 작정한 과거의 화려한 기억이 없다.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의 화려한 과거에만 집착하는 형과 엄마가 줄곧 못마땅하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한다.
유타는 변했고, 슌은 변하지 못했다.
슌이 매달려 있는 좋았던 과거란, 유타가 기억하지 못하듯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없던 일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는 걸 보는 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유타의 형과 엄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다.
자고로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함없이 지켜가야 할 것이 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변해야 함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서술했을 때,
[나가사키] 속의 슌과 같이 서술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변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리 분량이 많지 않다.
220여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이건 흑백사진이다.
누군가는 무색의 밋밋함에 실망하고 내팽개치겠지만,
누군가는 흑백사진 속에서 어떤 아련함이나 그리움 같은 걸 느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흑백사진 같다.
매 장이 끝날 때마다의 문장들이 아련하게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요시다슈이치의 작품중 처음 접했던 [퍼레이드]만큼의 강한 인상을 오랜만에 다시 보여주었다.
요즘 들어 얇은 책은 되도록 구매하지 않으려 하지만, [나가사키] 이 책은 예외다.

평점 ★★★★☆

인상깊은 구절-
떠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조용히 남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
어딘가로 가려고 결정하면 장래가 불안해지고,
남겠다고 결심하면 나중에 떠나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아 또 불안해지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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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7년 구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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